직무급 도입 실패 (평가 공정성, 구성원 동의, 임금 조정)
직무급 도입을 검토하면서 가장 막막했던 순간이 언제였냐고 물으신다면, 저는 망설임 없이 "구성원 설명회를 준비하던 그 주"라고 답할 것 같습니다. 롯데그룹이 전 계열사에 직무급을 도입하겠다고 발표한 뒤, 저희 회사도 본격적으로 검토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11년간 HR 현장에서 수많은 제도 개편을 겪어본 저로서도, 이번만큼은 '과연 이게 가능할까?'라는 회의가 끊임없이 밀려왔습니다.
직무급, 정말 공정한 평가가 가능할까요?
직무급이란 개인의 연차나 직급이 아닌 '직무의 가치'에 따라 기본급을 결정하는 임금 체계를 말합니다. 쉽게 말해 같은 일을 하면 같은 보상을, 다른 일을 하면 다른 보상을 받는 구조입니다. 롯데의 경우 40개 직무를 5개 등급으로 분류하고, 등급 간 기본급 격차를 최소 20% 이상으로 설정한다고 밝혔습니다(출처: 고용노동부). 기존의 사원·대리·과장 같은 직급 체계는 사라지고, 순수하게 '내가 하는 일'이 얼마나 회사에 기여하느냐로 평가받게 되는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 생깁니다. 과연 누가, 어떤 기준으로 직무의 가치를 매길 것인가? 저희 회사에서도 한국노동연구원이 개발한 직무평가 도구를 검토했습니다. 이 도구는 직무의 난이도, 책임 범위, 업무 강도, 대체 가능성 등을 수치화해 등급을 나눕니다. 일견 객관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평가위원회 구성부터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본부장급 이상만 참여할 것인지, 팀장급까지 범위를 넓힐 것인지부터 의견이 갈렸습니다. 평가 범위를 넓히면 수용성은 높아지지만, 이해관계가 얽혀 객관성이 흔들릴 위험도 커집니다. 반면 소수 경영진만 참여하면 현장 직무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져 "책상에서 만든 등급"이라는 비판을 받기 쉽습니다. 저는 이 딜레마 앞에서, 아무리 공신력 있는 방법론을 쓴다 해도 결국 '누가 평가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 한계를 절감했습니다.
구성원 동의, 어떻게 얻어낼 수 있을까요?
직무급 도입에서 가장 높은 벽은 법률적인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문제입니다.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이란 근로자에게 기존보다 불리한 조건으로 근로 계약을 바꾸는 것을 의미하는데, 이 경우 반드시 근로자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야 합니다. 직무급은 본질적으로 직무 가치에 따라 임금을 차등화하는 제도이다 보니, 필연적으로 하위 등급에 배치되는 직군이 생기고, 이들은 기존 연봉 테이블보다 낮은 보상을 받거나 상승 폭이 줄어들게 됩니다.
저희 회사도 시뮬레이션을 돌려봤을 때, 전체 직원의 약 30%가 현행 대비 불이익을 받을 것으로 추정됐습니다. 문제는 이들에게 "회사의 경쟁력을 위해 희생해달라"는 논리가 전혀 먹히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면담을 진행하면서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제 일이 왜 남들보다 가치가 낮습니까?"였습니다. 생계와 직결된 임금 문제에서 누구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일각에서는 설명회와 간담회를 반복하면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조언합니다. 하지만 저의 경험상 이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전망입니다. 제가 참여했던 설명회에서 하위 등급으로 분류된 한 직원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15년간 이 회사에서 성실하게 일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일의 가치가 낮다고 하면, 그 15년은 뭡니까?" 이 질문 앞에서 저는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직무급 도입은 단순히 제도 설계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 전체가 '공정'의 기준을 어디에 둘 것인지에 대한 철학적 합의가 선행되어야 하는 과제였습니다.
- 직무평가 방법론의 객관성 확보: 노동연구원 등 공인 기관의 평가 도구 활용
- 평가위원회 구성의 투명성: 본부장급뿐 아니라 현장 이해도가 높은 팀장급까지 참여 범위 확대 검토
- 구성원 동의 절차의 법적 준수: 취업규칙 불이익 변경 시 과반수 동의 필수
- 불이익 집단에 대한 장기 케어 방안: 단순 설명회를 넘어 심리적 안전감 제공
임금 조정, 현실적으로 어떻게 운영해야 할까요?
직무급 도입 후 가장 민감한 이슈는 '직무 이동 시 임금 조정'입니다. 만약 한 직원이 상위 등급 직무에서 하위 등급 직무로 이동하게 되면, 기본급을 낮춰야 할까요? 이론적으로는 직무 가치가 낮아졌으니 임금도 하락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런 조정을 받아들이는 직원은 거의 없습니다. 저희 회사에서도 이 부분을 두고 내부 논쟁이 가장 격렬했습니다.
일부 기업은 기존 연봉을 유지하되, 상위 등급으로 올라갈 때만 추가 금액을 얹어주는 방식을 택합니다. 이렇게 하면 도입 초기 반발은 줄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직무급 본래의 목적인 '직무 가치에 따른 차등'이 흐려지고, 인건비 구조 개선 효과도 반감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방식이 '직무급의 껍데기만 쓴 연공급'이 될 위험이 크다고 봅니다.
또 다른 쟁점은 순환 보직 문화입니다. 반도체 산업처럼 기술 전문성이 고도화된 분야에서는 직무 간 이동 자체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일부 기업은 여전히 "다양한 경험을 쌓아야 한다"며 무분별한 순환 보직을 유지하려 합니다. 직무급 체계에서 이런 관행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직무 전문성을 키울 수 있는 범위 내에서만 제한적으로 이동하고, 그 외에는 명확한 경력 개발 경로(CDP)를 제시하는 게 더 합리적입니다(출처: 한국노동연구원).
제가 가장 우려했던 부분은 하위 등급에 장기간 머물게 되는 인력에 대한 동기부여 방안이 전혀 마련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직급이 사라지면 승진이라는 목표도 없어지는데,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을 바라보고 일해야 할까요? 역량 개발을 통해 상위 등급으로 도전할 수 있다는 성장 사다리를 회사가 명확히 보여주지 않으면, 결국 핵심 인재부터 이탈하기 시작합니다. 저희 회사에서도 이 부분에 대한 구체적 설계가 부족해 결국 도입을 보류하게 됐습니다.
결국 직무급은 단순히 임금 테이블을 바꾸는 작업이 아니라, 조직의 철학과 문화를 송두리째 바꾸는 일입니다. 11년간 HR 현장에서 일하며 수많은 제도를 경험했지만, 직무급만큼 '공정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제도는 없었습니다. 롯데를 비롯한 많은 기업이 지금 이 길을 걷고 있지만, 성공 여부는 결국 구성원들이 평가 과정 전체를 신뢰할 수 있는 심리적 안전감을 먼저 만들어내느냐에 달려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도를 도입하기 전에, 우리 조직이 정말 준비되어 있는지 냉정하게 돌아보는 시간이 먼저 필요합니다.
--- 참고: https://youtu.be/BM_D-ABv8SE?si=Q2Wr55kr7y9EzWk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