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봉협상 테이블 뒤편에서 HR이 보는 것

10년 전 연봉협상 업무를 맡았을 때 지원자들이 왜 이렇게 높은 숫자를 부르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 지나고 나니 오히려 그 마음이 당연하게 보입니다. 문제는 전략이 없다는 게 아니라, 상대방이 어떤 숫자를 보고 있는지 모른 채 협상 테이블에 앉는다는 점입니다.
연봉협상은 인사팀 업무 중 가장 에너지 소모가 큰 시즌입니다. 양쪽이 서로 다른 숫자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원자는 "내가 받아야 하는 돈"을 이야기하고, 인사팀은 "우리가 줄 수 있는 돈"을 이야기합니다. 그 간극을 좁히려면 상대방의 숫자부터 알아야 합니다.
인사팀이 제일 먼저 하는 것: 숫자 뜯어내기
경력직 지원자들이 연봉을 말하는 방식은 정말 다양합니다. 기본급에 성과급을 더한 숫자, 식대·교통비·각종 수당을 얹은 숫자, 운 좋은 해에 받은 인센티브까지 포함한 숫자. 심지어 스톡옵션 평가액을 연봉으로 환산해 말씀하시는 분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사팀은 그 숫자를 들으면서 속으로 하나씩 빼고 있습니다. 인센티브는 빼고, 수당은 빼고, 일회성 지급은 빼고. 결국 남는 건 베이스 샐러리, 즉 기본급입니다. 성과급이나 인센티브는 회사마다, 연도마다, 개인 성과마다 달라서 비교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협상 테이블에서 실질적으로 통용되는 숫자는 기본급이라는 점, 이건 거의 숙명에 가깝습니다.
뻥튀기 전략이 역효과를 내는 세 가지 경우
연봉을 부풀려 말하는 게 전략이 될 수 있을까요. 단기적으로는 효과가 있을 수 있습니다. 첫 제시 숫자가 높으면 거기서 협상이 시작되니까요. 하지만 실무 현장에서는 이 전략이 역효과를 내는 패턴이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 인사팀 담당자는 비슷한 이야기를 수없이 듣습니다. 온갖 항목을 합산한 숫자를 제시할 때, 담당자는 이미 "아, 총액 기준으로 말씀하시는구나"라고 읽고 있습니다. 뻥튀기가 먹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상대방도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 재직증명서나 원천징수영수증을 요청하는 회사가 적지 않습니다. 규모 있는 기업일수록 이 절차가 표준화되어 있습니다. 서류가 나오는 순간 숫자가 정리되고, 그 과정에서 신뢰가 흔들리면 연봉 협상보다 중요한 것을 잃습니다.
- 너무 높은 숫자는 오히려 탈락 이유가 됩니다. 예산 범위를 한참 초과하면 인사팀 입장에서 "이분은 우리가 맞출 수 없는 수준"으로 정리되고 대화가 끊깁니다. 협상 테이블에 앉지도 못하고 끝나는 경우입니다.
인사팀이 연봉을 책정하는 실제 프레임
인사팀도 좋은 후보를 확보하고 싶다는 압박이 있습니다. 협상 자체가 적대적인 구도는 아닙니다. 다만 연봉을 책정할 때는 반드시 네 가지 기준이 맞물립니다.
지원자의 현재 베이스 샐러리가 시장 가치 기준점이 됩니다. 여기에 해당 포지션에 설정된 내부 직급 밴드가 결정적인 상한선으로 작용합니다. 이 밴드는 인사팀 담당자 선에서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구조입니다. 또한 비슷한 직급, 비슷한 경력의 기존 구성원들과의 내부 형평성이 생각보다 강력한 제약 조건으로 작용합니다. 새로 들어오는 사람에게 지나치게 많이 주면 내부에서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마지막으로 동일 직무, 동일 경력 수준의 시장 평균 데이터가 기준으로 쓰입니다. 한국고용정보원 등에서 발표하는 직종별 임금 통계가 이 시장 데이터의 근거로 활용되기도 합니다.
협상 테이블에서 실제로 통하는 접근법
숫자를 투명하게 구분해서 말하는 지원자는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기본급은 얼마이고, 성과급은 평균적으로 이 수준이었습니다"라고 항목을 나눠 말하면 인사팀 입장에서 "숫자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줍니다. 협상 자체가 훨씬 수월해지는 출발점입니다.
시장 데이터를 근거로 쓰는 것도 중요합니다. "저는 이 정도를 기대합니다"보다 "동일 직무 시장 평균이 이 수준이고, 저는 이런 이유로 그 이상을 기대합니다"가 훨씬 강합니다. 이렇게 접근하면 인사팀이 팀장이나 임원에게 보고할 때 쓸 수 있는 근거를 같이 드리는 셈이 됩니다. 감정이 아닌 논리는 내부 설득을 쉽게 만듭니다.
밴드를 벗어난 숫자 협상이 막혔을 때는 직급 자체를 올리는 방향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이 직급으로 입사하는 게 적절한지, 한 단계 위 직급 기준으로 검토해주실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때로는 연봉 숫자 협상보다 강력합니다.
이직을 준비 중이라면 지금 본인의 기본급을 정확히 파악해두시기 바랍니다. 총액이 아니라 기본급 기준으로, 각 항목이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미리 정리해두는 것입니다. 협상 자리에서 버벅이면 불리합니다. 베이스 샐러리가 막혔을 때를 대비해 직급, 사이닝 보너스, 인센티브 구조, 재택근무 여부 등 다른 카드도 준비해두는 사람이 훨씬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연봉협상 시 희망 연봉을 먼저 말해야 하나요?
A. 가능하면 시장 데이터와 근거를 먼저 제시한 뒤 희망 연봉을 말하는 순서가 유리합니다. 숫자만 먼저 던지면 협상 여지가 좁아질 수 있습니다.
Q. 원천징수영수증 제출을 거부해도 되나요?
A. 법적으로 강제는 아닙니다. 다만 거부 자체가 신뢰에 영향을 줄 수 있으므로, 제출하되 항목을 구분해 설명하는 방식이 현실적으로 유리합니다.
Q. 직급 밴드가 있다면 협상 자체가 의미 없지 않나요?
A. 밴드 내에서도 상단과 하단의 차이가 큽니다. 또한 직급 자체를 올리는 협상은 밴드 조정과 연결되므로 전혀 의미 없다고 볼 수 없습니다.
Q. 사이닝 보너스는 어느 시점에 요청하는 게 좋나요?
A. 베이스 샐러리 협상이 마무리된 후, 입사 의사를 확인하는 단계에서 제안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너무 이른 시점에 꺼내면 역효과가 날 수 있습니다.
Q. 내부 형평성 문제로 연봉이 낮게 책정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입사 후 일정 기간 내 성과 검토 조건을 협상 시 함께 요청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초봉이 아닌 1년 후 재검토 시점을 못 박아두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입니다.